자연의 원리에 맞춰 수련을 시작한 지 3년째, 나는 누구보다도 큰 혜택(?)을 누리고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시절에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생식기관에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 수술때는 나를 걱정하신 부모님이 맹장수술이라고 거짓말을 하셔서 몰랐지만, 두 번째 수술때는 의사선생님이 나의 병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주셨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며 앞으로 자연임신은 힘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나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얘기였다. 평소 생리때만 되면 남들보다 몇배나 강한 진통제를 먹어야 겨우 견디는 정도였고, 위장이 안 좋아 일년에도 몇번씩 위경련과 위염으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졌고 대장도 그다지 좋지않아 늘 설사와 변비의 반복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하고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탓에 한번 일을 시작하면 과로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결혼. 결혼하고 3년이 된 지난 96년 겨울부터 평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도 피곤하고 짜증이 날 정도로 몸이 안좋아졌다. 허리가 아파 앉아있는 것도 서서 걸어다니는 것도 불편했다. 한의원 치료를 받았지만 한의사 선생님은 근본적으로 내 몸이 많이허약하고 굳어있기 때문에 치료는 임시방편밖에 되지않으니 운동을 병행할 것을 권유했다.
그럴즈음 남편의 학교 선배님 권유로 홍익요가연구원을 알게 되었다. 연구원에서 처음 나를 상담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총체적 부실’이었다. 제대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진정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되물으셨다. 어쨌든 후 나는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수련과 체질에 맞는 자연생식을 시작했다. 수련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지만 생식을 먹는 것은 나와의 큰 싸움이었다. 평소 밥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생식을 먹기 시작하자마자 밥과 인스턴트 음식이 먹고싶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생쌀 먹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타고난 체질과 현재의 건강상태에 맞춰 여러 가지 곡물을 말려 빻은 곡물가루를 물이나 우유같은 데 타 먹기만 하면 되는 건데 처음엔 왜 그리 적응이 안 되든지. 생식을 하루에 한 번 먹는 것조차 정말 힘들었지만 건강상태를 잘 알았기에 억지로 스스로를 달래가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속 인내심을 갖고 수련해나갔다. 6개월 정도 수련을 했던 나는 몸이 좀 좋아지자 정신적으로는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집에서도 할 수 있을 거야’라며. 그리고 새로 시작한 공부를 핑계로 수련을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집에서도 수련을 했지만 얼마 가지않았고, 힘들었던 생식 역시 금새 멀어졌다. 그러면서 해가 바뀌어 10개월이 흐른 뒤 몸이 다시 힘들어졌고 결혼한지 5년이나 되어 아기문제도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시험관 아기 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는 결과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나와 남편은 아기없이도 살 수야 있겠지만 끝까지 노력도 해보지않은 채 포기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생각에 시험관아기시술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나의 상태가 시기적으로 더 늦어지면 임신자체는 고사하고 폐경이 빨리 올 수도 있다는 병원쪽 얘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이 무렵 큰선생님의 꾸중을 듣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생명잉태는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 줘야지. 서양문화 귀신에 다 빠져있으니, 쯧쯧…. 된장국은 왜 먹어?’라는 말씀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제 몸도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고 서두른다고 무엇이 되겠느냐.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는 법이지. 믿음을 갖게. 자기 몸 특히 한국여성의 몸은 대단한 거야. 좋은 결과가 올거야’ 하시며 위로해주셨다. 그 이후, 나는 정말 내 몸 하나 추스리는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이걸로 모든 것이 해결될까’하는 생각과 ‘정말 때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다시금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수련과 생식을 예전보다 열심히 하면서 무덥던 여름과 겨울이 지났고,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생리통이 예전과 비교하면 놀랄만큼 좋아져 진통제를 먹지않고도 견딜 수 있었고 항시 끊이지않던 위염과 장염도 언제 겪어봤냐는 듯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올해 2월에 열린 <깨닫기 주말학교>에 참가하고 나서는 조금 더 나 자신과 건강에 관해 알게 되었고 내 생활에서도 모처럼 ‘정신적인 여유’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미련이 남아 그만두지 못했던 방송국 일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었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큰선생님의 ‘쇠도 달구었을 때 두드려라’고 하신 말씀에 힘을 얻었고 예전보다 훨씬 정신적으로 안정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던 올해 4월의 어느날, 다른 달보다 유난히 늦어지는 생리가 걱정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임신이었다! 자연임신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나였기에 병원에서는 특별한 임상사례라면서 축하해주었다. 물론 가족들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친정어머님과 남편은 3개월이 될 때까지는 거의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하시며 걱정반 기쁨반으로 보살펴주셨다. 임신소식을 듣고 나서 큰선생님이 계신 멀리 봉골로 전화를 걸었는데 밭일하다 내려오셔서 의미있는 소중한 말씀을 해주셨다. “축하하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은 끝이 아니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네. 오도방정 떨지말고 스스로를 잘 살피게.”
결혼 6년째, 임신 4개월. 요즘도 한번씩 ‘정말 내가 임신을 한 걸까?’라는 의심이 들 때는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만져보며 현실을 실감한다. 이제 나에겐 아기와 나를 위해 남은 임신기간을 건강하게 보내어 건강한 아이의 얼굴을 보는 일만 남은 것같다. 너무도 하기 싫었던 때도 있었던 수련과 자연식이었지만 모든 걸 맡기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면 자신이 뜻한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젠 내 생활에서 무엇보다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준비하고 있으면 언젠가 때는 찾아온다는 그 말씀대로….
비록 본인은 전혀 실천하지않지만 수련과 자연식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속 밀어준 남편에게 고맙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홍익요가연구원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그에 보답하는 길은 더 열심히 수련하며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순산하는 것이리라.
*국O진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어학과 졸업. 교육방송(EBS)과 여러 케이블 TV에서 작가로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