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오기가 꽤 힘들었다. 고뇌하는 목소리의 오래전 어느 유행가 노래 가사처럼 ‘세월이 날 철들게 해’ 딱 이거다. 지내놓고 보니 요가는 내 인생에 슬며시 찾아온 기회였다. 천만다행으로 난 그걸 놓치지 않았다.
처음 요가를 시작하던 내 나이 28살. 이미 가정을 꾸리고 한아이의 엄마였다. 첫 애를 낳아 기르면서도 난 늘 바닥난 체력에 허덕거렸고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몸덩어리가 성에 차지 않았다. 아니지,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사실은 지긋지긋하고 지루하고 날 늘 웅크리게하고 주저앉히는 체력저하. 내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난 늘 골골했다. 초등학교 5월 그 따스한 봄날까지도 겨울 내복을 벗지 못하고 입고 다녔고, 좀 커서도 생리끝나면 감기, 감기 끝나면 다음달 생리 시작과 함께 진통제 없이는 못견디던 생리통을 당연하게 버텨야했다. 1시간만 걸어도 몸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고교졸업 후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대학진학하여 식사부실, 만성피로, 집 떠난 스트레스로 1년만에 내 몸은 온갖 신호를 울려댔다. 어딘가에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부풀어 오르는 온 몸 알러지 반응. 먹기만 하면 체해버리는 만성식체, 변비, 가위눌림, 어깨가 아프다 못해 쓰라릴 정도의 어깨통증, 좌우차로 인한 얼굴 틀어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 속에서 휴학을 했다. 그 때 내 심정은 ‘겉만 멀쩡했지, 난 장애를 갖고 있다’ 이거였다.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다운 패기와 열정은 내 것이 아니었고, 아무리 슬픈 소설책을 읽어도 난 공감은커녕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난 그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었고, 지친 심신으로 감정까지 메말라 있었다.
이렇게 초라한 몸 덩어리였지만 그래도 첫 아이를 임신한 기쁨은 세상을 다 갖은 듯 흥분됐었고, 임신기간도 별 탈 없이 지냈었다. 부실한 몸이었지만 그래도 워낙 젊은 나이에 임신한 덕분이었던 듯 하다. 그렇지만 자연분만을 하진 못했다. 아기가 한 쪽 골반에 걸려서 내려오질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제왕절개 수술로 첫 아기를 분만했고, 난 이 아기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고 있는 내 모습에 놀랐었다. 그 아기가 이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첫 아이가 3살 즈음 되었을 때, 별 기대없이(!) 우연히 지나가다 요가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전에 요가에 대해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홍익요가연구원에 들렀던 그 날 아침, 외출하면서도 그날 내가 요가원이라는 곳에 들르게 될 꺼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요가원에 들러 선생님께 첫 상담을 했고, “(생각 있으시면!)요가수련을 한 번 해 보세요” 이렇게 시작된 요가. 스스로를 장애라고 생각하며 살던 나, 요가수련 덕분에 그나마 사람구실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가수련을 시작한지 1년쯤 지나니 난 언젠가부터 감기를 안하고 있었고, 생리통도 약 없이 견딜 만했었고, 2년쯤 지났을 무렵 명현반응도 있었다. 그 당시엔 그게 명현반응인지 뭔지도 몰랐다. 그냥 내 몸에 또 탈이 났나보다 했다. 내 손과 발은 습진으로 엉망이었다. 내 손과 발은 본 어떤 이는 사람의 발이 아니라는 말도 했었다. 5년쯤 지나니 몸은 믿기지 않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더불어 내 자존감도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 건강을 만들어 냈다는 대견함과 자신감이 오히려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큰선생님의 말씀처럼 박쥐자세를 열심히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박쥐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정작 나의 바램은 박쥐가 되는 게 아니었던 것인데!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휴무일이라 남편은 쉬는 날이었다. 휴무일이었지만 그 날 요가원에서는 요가 수련이 있었다. 그래서 난 요가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뜬금없이 ‘나도 요가 해볼까?’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요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던 남편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초5학년 올라가던 큰 애랑 남편이랑 나 이렇게 세 식구가 새벽요가를 다녔다. 세 식구 요가는 비록 1달로 막을 내렸지만 냉랭했던 우리 부부사이에 다시 따뜻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터닝 포인트였고, 그로부터 2달 후 나이 마흔이 다되어가던 난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 첫달 난 임신인 줄도 모르고 새학기와 함께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다가 인후염을 동반한 몸살감기에 덜컥 걸렸다. 약을 쓸 수도 없고 직업이 교사다 보니 목을 계속 써야해서 1달 병가에 들어가게 되었다.노산인데다가 초반 몸살감기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난 두려움은 없었다. 나에겐 요가수련이 있었고, 요가연구원이라는 안식의 공간이 있었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늘 살펴주시는 연구원 선생님들이 있었다. 병가중이기도 하고 해서 임신5주까지는 요가 아사나를 하지 않고 감기가 호전되면서부터 만트라와 호흡수련으로 몸을 안정시키면서 입덧도 진정시켰고, 병가를 끝내고 다시 학교에 출근하면서부터 임산부 요가 수련도 매일매일 꾸준히 나갈 수 있었다. 요가수련을 꾸준히 해 온 나였지만 임신한 몸으로 요가수련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다부진 노력과 큰 정성을 요하는 수련이었다. 임산부 교실에서 함께 땀 흘리며 정성껏 수련하는 다른 임산부들의 모습을 보면 느슨해지고 얼빵해지려고 하는 나 자신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다. 늘 시간에 쫓겨 함께 수련하던 임산부 누구와도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 못했지만 함께 했기에 서로 의지하며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다. 함께 수련하는 임산부들의 순산을 늘 마음으로 기원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더 기운을 차려가며 요가수련을 해나갔다.
임신 중반쯤 되었을 무렵 큰선생님께서 특별히 임산부들을 위한 건강상담 시간을 마련해주셨다. 임신 전에도 몇 번의 체질분류와 기운체크를 받았는데 매번 좌우차와 기혈부족 불안한 호흡을 늘 지적받아 왔었던 터라 마음을 비우고 큰선생님 앞에 앉게 되었다. “기운이 안정되어 있어. 이대로만 하면 되겠어.” 오~! 진정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요가원에 걸음한 이래 처음으로 듣은 뛸 듯이 기쁜 메시지였다. 정말이지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이 말씀을 하셨다. “사는 게 재미있어요? 재밌고 신나는 일을 좀 하고 사세요.” 여전히 나에겐 숙제로 남아 있다.
예정일이 이틀이 지나고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 요가 수련을 끝내고 집에 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배가 살살 아픈 것 같기도 해서 잠이 깨어 화장실에 가보니 이슬이 비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정시키고 잠을 더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약하디 약한 진통이 왔다 갔다만 하고 진행이 되질 않아서 9시, 12시, 3시에 허리돌리기를 10분씩했다. 저녁8시쯤 되니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오기 시작하여 애기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첫아이를 제왕절개 분만을 했고, 노산이라 자연분만 출산은 힘들 거라는 주위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둘째 자연분만에 성공했다. 언감생심 꿈꾸었던 브이-백(VBAC)에 성공한 것이다!
더딘 진행으로 탈진상태였지만 땀흘리며 수련한 힘과 곁에서 함께 고통을 나눠준 애기아빠의 격려와 응원 속에 마지막 힘주기를 잘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칭찬을 받아가며 아기는 무사히 산도를 빠져 나왔다. 응애 응애 애끓는 듯한 울음소리와 핏덩어리인 채로 내 품에 안겼을 때의 그 진한 전율은 뭐라고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온몸을 덮쳐오던 출산의 고통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해냈다는 아기의 대견함과 산모인 나 스스로에 대한 흐뭇함 속에 이틀을 지낸 후 아기와 함께 퇴원했다. 이제 아기가 8개월이 다 되어가니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이고 열심히 기어다니며 세상과 만나고 있다.
*유O 님 : 위의 출산기를 읽으면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분이지요. 오랜 시간을 정성과 믿음으로 수련해오신 분이십니다. 둘째 출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