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저녁 11시 23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응애~’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소중한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6년,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 5년 그리고 7일만에 우리부부 새생명이 세상으로 나왔다. 한때 절망감으로 자포자기했던, 그래서 더 소중하고 사랑스런 우리 아가였다. 우리 아가의 이름은 현지, 이 현지이다.
 현지가 내 몸속에 있던 36주 1일이라는 시간. 예정일보다 20일이나 빨리 태어났지만 몸무게 3.16kg의 무척 건강한 딸이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한 임신이고, 또한 무척 힘들게 생긴 아기였기 때문에 내 몸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또 그것을 나에게 몸짓으로 확인시켜줄 때마다 가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임신초기에는 가벼운 입덧 증상만 있을 뿐이어서 아주 수월하게 지냈다. 그러다 4개월이 좀 지나자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붓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붓기가 거의 가라앉지 않을 정도였다. 선생님들과 상의한 뒤 나의 체질과 현재의 임신상태와 아기에게 맞는 생식을 먹자 5개월무렵부터 몸이 정말 가뿐하다 싶을 정도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불러오는 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정말 최상의 컨디션이 이어지는 날들이었다. 당시 살고있던 역삼동에서 신촌까지는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리는 대장정의 시간이었지만 출산할 때 내 아기가 좀 더 수월하게 세상을 마주할 수 있도록 일주일에 세 번이상은 수련에 꼭 참가하였다. 집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얼굴혈 풀기를 비롯해 발목 돌리기, 골반펴기등을 하였다. 수련을 꾸준히 한 덕분인지 체중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출산 때까지 몸무게가 11kg 정도 늘었고 배도 그다지 크지 않아 임신 7-8개월까지도 풍성한 점퍼 등을 입고 배를 가리면 임신한 티가 그다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예전에 자궁과 난관부위 수술을 했던 영향으로 항상 신장,방광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출산을 생각해서 연구원의 자연분만 프로그램의 자연생식법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노력했다. 예전같으면 약간 나태한 마음도 많이 들었을 텐데 하루하루 조금씩 쌓아놓은 기운들이 나 자신과 내 아기의 출산의 고통을 줄여줄 거라는 믿음때문에 수련과 생식을 꾸준히 해 나갔다. 원래 출산 예정일은 12월 17일, 남편의 생일이었다. 아이 아빠와 아이가 같은 생일을 가지게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은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났을땐 5개월 무렵부터 병원에서 아기가 크다는 얘기를 계속 들었던 터라 조금이라도 빨리 낳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낮에 수련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저녁밥을 먹은 뒤로는 꼭 삼사십분씩 산책하러 나갔다. 그리고 아기에게 “엄마 뱃속이 좁으면 좀더 일찍 세상으로 나오렴. 엄마도 네 얼굴이 빨리 보고싶단다...” 하면서 말을 걸곤 했다. 그러다 11월 26일, 아직 출산 예정일이 21일 정도 남았는데 약간의 피가 비쳤다. 걱정이 되어 장원장님께 의논하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하셨다. 병원에 가보니 자궁문이 1센티정도 열렸다고 했다. 하지만 첫아기이니까 예정일까지 자궁문이 약간 열린 상태로 지속될 수도 있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조금씩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진통이었지만 약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봉골에 계시던 이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안정이 되었고 진통간격은 조금씩 짧아졌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진통간격이 10분이내가 되어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자 진통간격이 불규칙해졌고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야 빨리 낳을 수 있을 것 같아 병원 안을 걷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를 계단, 로비를 왔다갔다하며 걸었지만 진전이 없어 진찰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시작한 진통으로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많은 피로를 느꼈는지 집에 와서도 진통이 계속되긴 했지만 2시간 정도 잠을 푹잤다. 그러다 저녁 7시경 갑자기 진통이 빨라지고 이전의 진통과는 다른 차원의 아픔이 느껴졌다. 진통이 심하게 느껴질 때마다 호흡을 하면서 몸을 이완시켜나갔지만 빨리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았다. 토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차가 밀려 병원에 도착하자 8시30분이나 되었다. 하지만 병실엔 달랑 나 혼자만 남겨졌다. 남편이나 가족 중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으나 그건 병원규정상 안된다고 하였다. ‘여기 남겨진 건 나와 내 아기뿐, 내가 의식을 놓아버리면 내 아기도 힘들겠지. 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도록 힘을 내야지.’ 혼자 남겨진 나는 몸을 이완시키기 위해 누워서 계속 교호호흡을 했다. 처음엔 긴장한 탓인지 발도 시렵고 온몸이 떨렸지만 호흡을 계속하자 발에 온기도 돌아오고 몸도 편안해졌다. 진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간격도 무척 짧아졌다. 그러나 진통만 잦아졌을뿐 자궁문은 별로 열리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골반 펴기와 모세혈관 운동을 계속하면서 아기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말을 걸었다. ‘조금만 힘내라. 잠시 후면 엄마를 볼 수 있어. 힘낼 수 있지.’ 계속해서 아기와 대화를 한 탓인지 다시 자궁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11시 23분 나의 딸 현지를 만나게 되었다. 가슴 가득히 감사함으로 충만해지는 순간이었다.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하고 아기의 따스한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회복실에서 2시간을 안정한 후, 분만실을 나왔다. 양 손에 V자를 그리며…. 분만 다음 날 아침, 기본적인 검사와 처치를 끝낸 후 아기와 만나 첫 수유를 하게되었다. 아직은 젖을 빠는 아이도 낯설고 젖을 물리는 엄마도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너무나 신기하고도 사랑스런 순간이었다.
나의 딸 현지가 세상을 마주한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요즘은 하루에 한번씩 물리던 젖병의 우유를 마다하고 엄마 젖만 찾는다. 그래도 체중도 제법 많이 나가고 옹알이도 하면서 귀여운 짓을 많이 한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있는 기쁨, 새 생명의 기쁨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느끼는 요즈음이다.
*국O진 : 임신하기까지 방송국에서 일어번역 및 작가로 활동했다. 요즘은 예쁜딸과 가슴 넉넉한 남편의 보살핌속에서 결혼의 참맛을 한창 느끼느라 시간가는줄도 모른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