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주일째 글에 진전이 없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남편이 그럽니다. ‘너무 힘이 들어갔어’라고. 괜히 멋을 부리려 한다는 얘기지요. ‘그런 게 아니야’하고 큰소리는 쳤지만 저도 잘 압니다. 제가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걸요.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시작합니다. 제가 윤이를 낳으며 겪었던 일과 생각들이 단 한 분에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입니다.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학시절 신입생환영회 때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선배랍시고 끼어 이런 얘길 한 기억이 납니다. ‘어떤 글을 쓰는가가 먼저가 아니고 어떻게 사는가가 먼저라고 생각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을 했더랬지요. 그리고 전 그 말을 잊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에 대해 늘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요즘 부쩍 더 저를 괴롭힙니다.
예정일을 하루 앞둔 날, 남편을 출근시키려고 일어나 거실로 나오는데 갑자기 밑에서 따뜻한 것이 흘렀습니다. 양수가 먼저 터진 거죠.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짧은 지식에 의하면 그건 그다지 좋은 조짐이 아니었거든요. 이러면 안 되는데 중얼거리면서 요가연구원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너무 당황하지 말고 잘 챙겨서 병원에 가보라는 말씀으로 절 진정시켜 주셨습니다. 다니던 병원으로 가 이런저런 수속을 마치고 바로 분만대기실로 가서 누웠습니다. 그때까지도 진통의 기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저절로 진통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더군요. 가자마자 링겔을 통해 촉진제를 맞았습니다. 초음파로 아기의 자세를 보더니 아기가 아주 자리를 잘 잡았다고 하더군요. 링겔을 꽂지 않은 손으로 사자자세하는 걸 보고 의사와 간호사가 그러더군요. “머리가 아파요?” “아니요, 요가 동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누워서 할 수 있는 아사나를 하며 네 시간째 촉진제를 맞았는데도 진통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배 아파요?” “아니요.” “이상하네. 그런데도 어쨌든 한 시간에 일 센치씩은 자궁문이 벌어지고 있네요.” 면회시간이 되어 남편이 절 보러 들어왔을 때 진통은 없었지만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혼자 구석진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거든요. 이 사람이 옆에 있어주면 훨씬 안정된 마음으로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낳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무섭고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이 없이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도 출산못지 않은 고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몸의 이완이 늦어지고 호흡도 자주 끊어졌지요. 오후 두시쯤 분만실 스텝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같은 질문을 또 반복했고 그러더니 좀 지나자 갑자기 제 주변이 막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기의 심장박동 횟수가 자꾸 떨어진다 는 것이었습니다. 회복이 안되면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피검사를 다시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를 다시 했습니다. 저는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이라뇨. 절 살피러 온 간호사에게 ‘전 절대 수술을 할 수 없어요’라고 했더니 그 간호사가 ‘왜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호흡을 했더니 다행스럽게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아기의 호흡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계속 집중해서 호흡을 하면서 삼신할머니와 아기에게 간절한 바람의 말을 올렸습니다. “삼신할머니, 전 자연스러운 길을 통해 우리 아기를 만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아가야, 조금만 힘내서 엄마와 편안하게 만나자.”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었습니다. 호흡을 좀 오래 하다보니 머리가 어지럽고 너무 기운이 달렸습니다.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분들은 호흡 깊이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까라고 하실 지 모르겠지만 내 온힘을 모아 제대로 된, 길고 깊은 호흡을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후 네시가 되어서야 생리통 정도의 진통이 느껴졌고 여섯시 가까워서는 진통의 횟수와 강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강해졌습니다. 엄마와 남편의 짧은 면회가 있은 후 손을 집어넣어 본 의사가 거의 다 됐다고 촉진제의 양을 갑자기 확 늘렸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 분만실로 가기 전에 힘주기 연습을 두 번 하는 동안 너무 두렵고 아파서 소리를 딱 한 번 질렀습니다. 어디에도 눈을 마주하고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바로 분만실로 옮겨서 두 번째 진통이 왔을 때, 더 버틸 수 없다고, 의식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더는 숨쉬기도 힘들다고 느꼈을 그때 ‘다 끝났다’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두 번째 면회를 하고 나가신 엄마가 제 얼굴 봐선 아직 멀었다고 남편과 잠깐 식사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셨을 때 우리 아기가 태어난 거죠. 제가 윤이를 낳으며 느낀 것은 우리 나라처럼 제왕절개가 보편화된 곳에서는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지를 갖기 위해선 자신과 아기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믿음은 임신과 출산이 그저 자연의 섭리에 하나라는, 여자라면 누구나 해낼 수 있다는 오기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실은 저도 요가를 배우기 전에는 ‘안 되면 수술도 할 수 있는 거지 뭐’하는 생각을 했었고, 그것이 아이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수련을 하며 큰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아이와 내 건강에 얼마나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었나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지요. 또 한 가지, 몸을 빨리 이완시키고 아이의 숨길을 마지막까지 잘 지켜주기 위해서는 평소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 얕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런 호흡으로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고 깊은 호흡, 그것은 한 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더군요. 그야말로 훈련과 반복을 통해 몸에 익히지 않으면 그 긴박한 상황에서 제대로 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아기를 낳기까지의 과정이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랍니다. 임신을 하자마자 시작된 지독한 입덧으로 한달 이상을 거의 물도 삼키지 못하고 병원에서 포도당 주사만 맞으며 보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집 앞 개인병원에 입원해 있던 저는 그걸 감당할 만한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지요.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구들이 일단 종합병원으로 저를 옮겼고 거기서 준 신경안정제를 먹고는 입덧이 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약을 안 먹고 더 참아낼 수는 없었는지…. 이 생각을 하면 지금도 종종 죄책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전 제 몸 하나도 혼자 가눌 수가 없어졌습니다. 몸이 이럴진대 마음밭이 어땠을지는 더 말 안 해도 아시겠지요. 신경질과 짜증으로 식구들을 힘들게 했고 또 그런 저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이대로는 아이를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요. 임신 6개월이 지난 그때서야 임산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수련이 있다는 것에 믿음이 가 요가를 해야겠다 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하고 정말 짧은 기간의 수련을 해서 몸이 좋아질까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엔 수련을 하는 시간이 그저 너무 편하고 좋아서 열심히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차츰차츰 무겁던 몸과 곤두선 마음이 가뿐하고 차분해졌습니다.
이제 출산은 끝났고 아이가 저에게 왔습니다. 전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아직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을 먹이고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고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할지, 어떤 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인지 전 요즘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지만 정작 제 중심을 잡아줄,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은 제 손에 잘 잡히지가 않습니다. 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른다는 건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어느 책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오히려 넉넉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산보다 무겁고, 깊으면서 밝고, 시리도록 맑으면서 따스한….” 참 알 듯 모를 듯 막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뭔가 꽉 들어차는 것 같은 마음에 가끔씩 되뇌어 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일까요? 제게 그 질문을 다시 던져준 우리 윤이와 함께 전 이제 그 답을 찾으러 나서야 겠습니다. 뭔가 작은 깨우침이라도 찾길 기대하면서….
*박O숙님:대학을 졸업한 후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중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난 겨울 덩치가 2배는 넘을듯한 남편과 함께 겁먹은 사슴마냥 큰 눈에 가냘픈 몸매로 오손도손 수련하던 그 임산부가 어느새 아빠를 꼭 빼닮은 아들을 안고 백일떡을 들고 연구원 출판 편집실에 인사왔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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