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날처럼 임산부 수련을 하고 와서 저녁으로 빈대떡을 부쳐먹던 참이었습니다. 예정일이 20여 일이나 남아있었기에 ‘오늘쯤 병원에 갈 짐을 챙겨봐야지’하던 참이었는데 아래로 뜨거운 액체가 주르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싶었죠. 정말이지 절대 수술은 안된다고 다짐하던 저였는데 병원에서 이를 빌미로 수술을 시킬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로 요가연구원에 전화를 했더니 의사에게 어떻게 요구를 하고, 진통이 왔을 때 호흡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차분하게 일러주시더군요. 심호흡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그 와중에도 저절로 「쉬운 요가 편안한 임신」책을 잊지 않고 챙기게 되더군요. 병원으로 가는 중에도 계속 양수가 흐르니 너무 걱정이 되어 ‘제발 아이에게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아이와 제가 자연스럽게 만나게 도와주세요’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어요. 다행히도 의사 선생님은 충분히 자연분만뿐 아니라 수중분만도 가능하니 기다려보자고 저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그 병원은 수중분만으로도 유명하지만, 폭력적인 분만환경을 지양하고 남편의 분만참여, 분만 후 모자동실의 입원실로 유명한 병원이었습니다). 방 같은 대기실에서 남편과 둘이 있는데 조금씩 진통이 오는 듯 하더니 관장을 하고 난 후 사라져 버렸습니다. 밤 12시부터 병원에서 주는 진통촉진제 6알을 1시간에 1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먹고 난 후에도 진통이 오지 않으면 촉진제 주사를 놓겠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안되면 유도분만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구요. 알약을 1시간마다 먹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목돌리기, 골반펴기 등을 하고 조금씩 오는 진통에 호흡도 해보며 기다렸습니다. 알약을 다 먹고 난 후(오전6시 무렵)부터 배가 많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한 5분 간격으로 진통이 올 때는 아파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해주는 허리 마사지로 견디고 진통이 사라질 때서야 겨우 숨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때가 오전 8시쯤이었을까, 내진 온 간호사가 아직도 반밖에 진행이 안되었으니 오늘 저녁이나 되서야 낳을 거라고 하더군요. 헌데 얼마 안 있어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지는 통증이 오면서 저절로 밑에 힘이 가해지더군요. 다급히 온 간호사가 거의 다 열렸다고 진행이 빨리 되었다고 말하면서 분주해졌습니다. 수중분만실로 안내되어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니 진통도 덜해지면서 마음도 진정되었고 무엇보다도 남편이 뒤에서 저를 도와주니 정말 안정이 되더군요. 앞에서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힘주는 방법도 일러주고 가끔씩 아가의 심장소리도 들려주며 호흡을 잘 하라고 격려하시더군요. 신기하게도 진통사이에 기운을 잃고 호흡을 잘 하지 않으면 아가의 심장소리도 느려지더군요. 따뜻한 물 속에서 힘주기와 호흡을 반복하다보니 정신이 몽롱해지고 기운이 빠져 갔지만, 아가가 훨씬 더 힘들다는 연구원 선생님의 얘기를 기억하고 마음을 다잡으며 정성을 다해, 정말 젖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힘을 준 지 1시간이 지났을까, 저는 오전 10시 50분쯤에 저희 첫 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20여일이나 빨리 나왔지만 몸무게도 정상이었고(2.9Kg) 신생아답지 않은 똘망똘망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벅찬 경험을 한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군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적같고 아름다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은 갖고 있었지만 저의 몸 상태는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약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며 숱한 아픈 이들을 만났어도 정작 나 자신이 질병을 앓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정작 아픈 이의 마음을 진정으로 몰랐던거죠. 그런 제가 3년 전에 결핵이라고, 그것도 다소 심하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는 눈물마저 솟구치더라구요. 아파 본 사람만이 건강의 절실함을 안다고 그후부터 저는 많은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질병은 자신의 마음상태, 생활습관에서 오며 몸이 아프면 마음도 생활도 황폐해지고 주변의 사람들 에게도 생각대로 대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남이 아닌 스스로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제 대신 아파 줄 수는 없었거든요. 여러 가지 노력으로 회복도 빨리 하고 하던 일도 쉬던 상태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이미 많이 약해진 저의 몸은 초반부터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입덧은 없었지만 피곤함과 무기력함으로 잠만 자게되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제 몸은 자연분만은커녕 아가도 건강하게 지킬 수 없을 것 같더라구요. 임산부 요가를 수련한 덕분에 편안하고 즐겁게 임신기간을 보내고 더구나 몇 시간만에 순산했던 올케를 지켜보았기에 충분히 믿음이 가서 주저없이 임신 2개월째부터 당장 연구원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난히도 굳어있는 제 몸이 따라 하기에 힘든 동작도 많았지만 수련 뒤의 가벼워지는 몸과 편안해지는 마음에 나름대로 열심히 다녔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밝아져 더 이상 좋은 태교가 없더군요. 그윽한 향, 따뜻한 차, 연구원 선생님들의 차분한 미소와 격려, 온전히 나와 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 임신기간 내내 저와 아가를 지켜준 요가수련으로 인해 저는 임신전보다 더욱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고 더욱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숨쉬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부분을 자연의 방법대로 하기를 강조하는 연구원의 지침에 힘입어 무공해 농산물을 공급해주는 단체에도 가입하여 먹거리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재봉틀 만지는 법도 배워 아가 이불이며 기저귀 가방이며 직접 만들어보는 즐거움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맘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긴거죠. 게다가 임신 후반기에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대여섯 시간씩 앉아서 <깨닫기주말학교>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요가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다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하셨지만 저는 그것이 저와 아기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답니다. <깨닫기주말학교>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나가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답도 얻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다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큰선생님이 말씀들은 자주 저를 뒤돌아보게 하며 맘을 다지게 합니다. 자연과 우리의 환경에 대한 것, 몸의 원리와 자연의 원리에 대한 것,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은 주체적일까, 어떻게 살아야하나, 진정으로 건강한 삶이 무엇인가, 등등.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도 종종 맞닥뜨려지는 생각의 끈들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헛된 논리들이 많은지 이런 인연이 아니었으면 저 역시 이런 논리들에 휘둘려 맘과 몸의 평정과 건강을 잃었을 것이고 제 아이도 힘들게 했었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임신부터 출산까지 작년은 정말이지 제게 너무 아름다운 한해였습니다. 힘들고 두려울 수도 있는 이 과정을 이렇듯 아름답게 보내게 해준 요가와의 인연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익요가연구원의 선생님들 모두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달에는 지금보다 자연을 많이 안을 수 있는 서울 근교의 논밭 속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이는 남편의 오랜 숙원이었는데 요가와 <깨닫기주말학교>를 통한 배움이 저희의 이러한 선택이 아주 잘한 일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저희는 물론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될 거라는 생각에 저 역시 가슴이 뛰는군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련을 꾸준히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가는 정말이지 저의 평생의 좋은 벗이 될 겁니다. 유달리 봄이 기다려지는 해입니다.
*김O연님:약사에서 이제 은식이의 엄마가 되었다. 올케, 남편까지 함께 수련한 요가 가족으로 지금은 몸매를 만들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산후요가를 수련하고 있다. 특유의 미소로 함께 수련하는 다른 임산부들의 마음까지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